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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온천의 역사적 유래와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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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금천파크온천 작성일19-06-06 23:22 조회8,9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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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목욕탕, 동래온천 


동래온천은 행정구역 상 동래구 온천 1동 일대로서 온천수가 나오는 곳이다. 관광지로서 기능을 했던 동래온천 일대는 1970년대 이후로 시가지가 개발되면서 

도시 경관이 바뀌었다. 지금 동래 온천장 주변은 복합적인 공간이다. 상업과 숙박 시설 외에도 아파트까지 세워짐으로써 동래 주민의 생활 중심지로 기능을 한다. 

하지만 땅속에는 여전히 따뜻한 온천수가 흐르고 있다. 온천공(溫泉攻)에서 뽑아진 온천수가 이 일대의 관광시설과 숙박업소에 공급되고 있다. 

 

지하 깊은 곳에서 달궈진 온천수가 흐르고 흘러 지표면으로 나오듯이 동래온천의 역사도 심연(深淵)에서 출발하여 유구하게 흘러왔다. 

신라시대부터 명성이 났던 동래온천은 우리나라 관광 역사의 본보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동래온천은 치료와 휴양의 공간으로 역할을 해왔다.


전국의 피부병 환자 등은 동래온천의 펄펄 끓는 물에 몸을 담금으로써 지병이 치료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근대의 동래온천은 관광과 유흥의 장소로 변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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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의 공중욕탕

 

동래면에서 운영했던 공중욕탕을 축소시킨 모형이다. 

동래온천장에 설립된 공중욕탕들은 대중적 목욕탕의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010년 동래면은 면 직영으로 공중욕탕을 운영하였다. 1920년대 동래면 직영의 공중욕탕은 온천을 굴착하여 확장하였으며, 건물도 새롭게 지었다.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도 1916년 공중욕탕을 개설하였고, 1920년대에는 만주철도주식회사가 인계를 받았다. 이회사는 공중욕탕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였다. 

수십명을 수용할 수 있는 욕탕을 비롯하여 별탕과 객실 등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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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료에 기록된 동래온천


삼국시대 동래 온정은 신라의 대표적 관광지였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문왕 시절 재상 충원공이 다녀갔다고 기록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신라의 왕들이 여러 번 이곳에 왔다고 썼다. 왕이나 재상이 찾는 휴양지였으므로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욕탕을 세웠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이규보로부터 "땅이 외졌다"는 말을 듣기도 하였음에도 권신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목욕을 마친 후에는 시원한 

마음으로 여러 시를 남겼다.

 

조선시대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신병치료를 위하여 제자들과 함께 동래온천을 다녀갔다. 정구의 제자 이윤우가 적은 「한강선생봉신욕행록」에는 정구 일행이 

동래온천에 방문하는 과정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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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따뜻한 온정(溫井)의 고장 


오랫동안 동래는 부산의 중심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관아와 각종 관청 건물, 민가들이 입지하였으며, 주변의 구룽지를 이용하여 성곽이 축조되었다. 

동래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이거니와 온천을 할 수 있었기에 관광지로도 유명했다. 

국립여관이라 할 수 있는 온정원(溫井院)은 목욕탕과 객실이 있었으며, 많은 욕객이 방물을 했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온천(溫泉)을 '온정(溫井)'이라 썼다.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는 우물로 생각하여 정(井)자를 쓴 것이다. 삼국시대 동래 온정은 왕과 귀족이 찾는 대표적 관광지였다. 고려시대에는 수도인 개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권신들이 꾸준히 동래온천을 찾았다. 

 

조선시대에는 대군들과 공주, 대신들이 동래 온정을 찾게 되면 왕은 후하게 대접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조선시대 동래온천은 특권세력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이용을 하였다. 온천은 환자들이 병을 치료하고 휴양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특히 목욕을 하여 피부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환자들이 많이 들리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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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온천장으로 개발된 동래온천 


개항 이후로 일본인들의 동래온천의 입욕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졌다. 부산의 일본인 거류 민단과 일본 영사관은 동래온천의 입욕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강제적 한일합방 이후로 일본인들은 동래 온천장 주변의 시가지를 정비하고, 교통시설을 구축하였다. 식민지 시기의 동래온천은 일본인들의 주도로 이뤄졌으며, 

일본인들의 휴양과 관광을 목적으로 한것이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서 동래의 하천 주변 토지가 일본인들에 의해 점차 잠식 되었으며, 온천장 일대에 일본인들의 거주도 증가 하였다. 

1907년 동래 온천장에 일본인들의 가구는 6호에 불과 하였으나, 1920년에는 49호, 1931년에는 100여 호로 급증하였다. 온천장 중심지 에는 숙박업소, 

요식업소, 권번, 별장, 공중목욕탕등이 입주하여 관광 유흥지로 변모 하였다. 

 

동래온천에서는 금정산 자락의 아름다운 풍치를 즐길 수 있었으므로 일본인 부호들의 별장들이 늘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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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장 전경>

봉래관을 비롯한 몇개의 여관이 들어서 있다. 개발이 시작되는 동래온천의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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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양대에서 본 동래 온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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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장 전경>

1927년 이전에 촬여한 동래 온천장이다. 온천장 전차 종점이 입구 사거리에 있으며, 욕객들이 걸어서 온천장에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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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장 전경>

1932년 온천천 제방공사가 끝난뒤의 모습이다. 온천장 전차 종점이 온천천을 지난 안쪽에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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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장 시가지>

각종 상점이 들어선 온천장의 시가지 모습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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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장 본정(本町)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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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장 시가지>

등전옥 백화점에서 발행한 사진엽서이다. 사진 속 오른쪽에 있는 상점이 등전옥 백화점으로 추정된다. 기모노와 게다를 착용한 일본여성이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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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장의 면욕장(面浴場)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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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의 동래온천 벚꽃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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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 벚나무>

동래온천의 벚나무의 꽃들이 활짝 개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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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 전경>

동래온천장 주변이 벚꽃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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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 벚꽃나무 길>

 

동래의 지리와 온천


동래는 금정산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래온천도 이 금정산을 배경으로 생성된 온천이다.

금정산은 최고봉인 고당봉 외에도 원효봉, 무명봉, 부채봉 등 수많은 산봉과 능선으로 분지를 이루고 있다.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긴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산록은 급경사를 이룬다. 이쪽으로 계곡이 흐르고, 하천이 발달되었다. 화산지대의 온천에서는 화산의 열기에 의해서 데워진 지하수가 나온다. 

 

비화산지대의 동래온천은 화강암지대에서 생성된 온천이다. 동래 온천장은 동래천과 온천천의 서쪽에 위치 하였다. 이 일대는 하천에 의해서 운반물질이

퇴적되어 형성된 범람원이다. 

 

이곳에 온정원(溫井院)을 중심으로 온천 마을이 입지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금산마을, 중리마을, 차밭골 등이 주로 금정산의 하단부에 위치하였다. 

이중 중리마을이 가장 규모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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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부산의 관광일번지, 동래온천


일제강점기에는 동래 온천장으로 가는 교통수단과 도로시설 등이 갖추어졌고, 목욕을 할 수 있는 여관과 공중욕탕이 늘어 났다.

근대적 도시 시설이 정비되고 대중들이 많이 찾는 동래온천은 근대의 관광지로 성장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 동래 온천은 일본인들과 특권층 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도 방문하는 대중적 관광지였다.


10만이 넘믄 관광객들이 동래온천을 방문함에 따라 명실공히 조선의 대표 관광지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근대에 발행된 사진엽서와 리플렛, 

그리고 부산소개 책자에는 빠짐없이 동래온천이 등장한다.


이런 관광자료들은 대중적 관광지로서 동래온천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동래온천으로 방문객들이 증가함에 따라 온천장에서 여러 행사가 벌어졌다. 

봄철에는 벚꽃 축제와 씨름대회, 각종 공연들을 개최하여 욕객들을 맞이하였다.

 

특히 벚꽃이 활짝 피는 4월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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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온천장의 여관 


동래 온천장의 여관은 다목적 관광 공간으로서 숙박업과 목욕업, 그리고 요리집의 기능까지 두루 갖춘 종합적인 휴양시설이었다.

부산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동래온천에서 입욕할 수 있는 권한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여관을 세웠다. 동래온천에서 최초로 개업한 일본인 연관은 야쓰시여관이다.  


이후로 1903년 일본인의 전용 여관인 광월루가 입주하였고, 1907년 도요타가 스스로 온천을 파서 호라이관(逢萊館,봉래관)을 건립하였다.

전차가 운행되면서 욕객이 증가하자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여관과 요정 등도 50여 호로 증가하였다. 봉래관을 중심으로 숙박과 유흥시설이 운집한 형태였다.  

1920년대 경 일본식 여관으로 호라인관을 비롯하여


도라이관, 나루토관, 요꼬이관, 아라이관, 와키야, 시즈노야, 마스바야, 야마구치, 유노모토 여관 등이 있다. 사설 여관들 가운데는 상당수 내탕(內湯)시설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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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온천장의 기생 


동래 온천장에는 기생조합인 권번(券番)이 있었다. 

권번은 조선의 관기(官妓)들로 구성되었다. 관기 제도는 강제적 한일합방 시에 해산되었으나, 생계가 막연했던 관기(官妓)들은 조합을 만들고동래온천에 진출하였다. 

그들은 부채춤, 가야금, 장고 등의 악기들을 능숙하게 다루고, 판소리와 예법까지 익힌 예인(藝人)들이었다. 전국의 한량들은 동래 기생들을 찾아 동래 온천장의 여관과

요적으로 몰려 갔다. 이로써 동래온천의 기방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일본 기생인 게이샤도 동래온천에 진출하였다. 동래온천을 찾는 주요 손님은 일본인 남성들이었기에 이들을 상대로 한 게이샤들을 필요로 하였다. 

동래온천장에서 가부키 화장을 하고 기모노를 걸친 채 나막신을 신은 게이샤들은 낯선존재가 아니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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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건강과 위생 


일제는 보건 국가의 입자에서 식민지 조선의 위생과 청결을 선도하고자 했다. 제국주의의 국가들은 식민지 국민들이 잘 씻지 않아 청결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식민지의 비위생적 관습이 전염병을 유행시키고 나아가 사회를 혼란시키는 원인이라 여겼다. 위생 국가의 국민은 병균을 퍼뜨리지 않거나 병에 걸리지 않는 신체를 

위해 자신의 몸을 열심히 씻어 청결히 유지해야 했다. 

 

개인의 건강하고 청결한 몸은 제국의 통치에도 일조하였다. 일제는 건강한 신체의 식민지 국민들을 일상적으로 동원하고자 했다. 목욕을 통해 깨끗한 몸을 일상화

시키고, 운동으로 단련된 건강한 신체를 유지함으로써 식민지 국민들을 제국을 확장시키는 원동력으로 삼고자했다. 

청결하고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루 수 있는 운동이 '수영'이었다. 

 

조선인들도 식민지 상태를 극복하고 부국강병의 근대 국가를 이루는 기반이 젊은이들의 강건한 몸에 고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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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목욕과 깨끗한 몸 


청결한 위생 사회와 부국강병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튼튼하고 깨끗한 신체'가 필요했다. 일제는 각지역에서 목욕탕을 지어 대중들이 목욕하는 일을 권장하였다.

목욕은 공중 위생과 청결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실제로 전염병의 대유행은 국가의 행정 통치를 무너뜨리는 배경이 되었다. 

근대의 목욕은 세정용품들을 발전시켰다. 몸을 깨끗이 씻는데 필요한 비누, 치약, 삼푸 등 다양한 상품들이 생산되었다. 

화학용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은 이윤의 증대를 위하여 세면, 양치 목욕 등 신체의 청결을 강조했다.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는 청결의식은 곧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고 치장하는 미의식과 연관되었다. 

근대 이후로 미장과 이발 도구, 그리고 화장품 등도 더욱 발전하였다.

조선인들도 식민지 상태를 극복하고 부국강병의 근대 국가를 이루는 기반이 젊은이들의 강건한 몸에 고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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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의 동래온천 


해방 이후 동래 온천장의 연관들은 한국인들에게 인수되었다. 

백록관, 동래호텔, 황정여관 등이 대표적 여관이었다. 한때 동래호텔과 별장 등은 미군들이 임대하였으며, 군인호텔이 설립되어 휴양지로서 기능을 하였다. 

 

1950년대 이후에도 동래 온천장은 관광유흥지로서 전국적인 명성이 이어졌다. 목욕과 숙박을 하러 온천장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당시까지도 

동래 기생들이 활동을 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 부산시역의 확대와 인구 증가, 고속도로의 개통에 따라 동래 온천장 주변은 주거와 교통 면에서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한편, 부산은 우리나라 목욕 문화의 혁신을 가져온 탕원(湯院)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표적 목욕풍속은 때를 미는 것이다.

때 타올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 부산의 한 직물공장이었다. 목욕탕이 증가하고


청결관념이 강화된 상황에서 때 타올은 전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때 타올은 필수적인 목욕요품이 되었고, 외국에도 

한류처럼 때를 미는 목욕문화가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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